2025년 정기 희년 선포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Spes Non Confundit)
페이지 정보
본문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5년 정기 희년 선포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Spes Non Confundit)
하느님의 종들의 종
로마 주교 프란치스코가
이 편지를 읽는 모든 이의 마음에
희망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1. Spes non confundit.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바오로 사도는 희망의 영 안에서 이 격려의 말씀을 로마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전하였습니다. 오랜 전통에 따라 교황이 25년마다 선포하는 희년 가운데 하나인 다가오는 희년의 핵심 메시지도 희망입니다. 저는 이 성년(聖年)을 체험하기 위하여 로마를 방문할 모든 희망의 순례자, 그리고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도시를 찾아올 수 없지만 저마다 지역 교회에서 희년을 경축할 그 밖의 모든 사람을 떠올려 봅니다. 모든 이에게 이 희년이 우리 구원의 “문”(요한 10,7.9 참조)이신 주 예수님과 참되고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는 때가 되기를 빕니다. 교회의 사명은 “우리의 희망”(1티모 1,1)이신 주 예수님을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내일 무슨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지만, 희망은 좋은 일이 생기리라는 기대와 바람으로 저마다의 마음속에 자리합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때때로 상반되는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확고한 신뢰에서 우려로, 평온에서 불안으로, 확신에서 주저와 의심으로 변합니다. 아무것도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다는 듯 낙심하여 미래를 비관적이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우리는 빈번히 마주칩니다. 이 희년이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희망의 이유를 찾도록 도와줍니다. 이 말씀에 따라, 바오로 사도가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고자 하였던 그 메시지를 되새겨 봅시다.
희망의 말씀
2.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1-2.5). 바오로 성인은, 우리가 이 성경 말씀 안에서 많은 성찰을 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간이 바오로 사도의 복음화 활동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까지 바오로 사도는 로마 제국의 동부에서 활동하였지만 이제 그는 로마로,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 로마가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향합니다. 이는 곧, 그가 복음 선포를 위하여 맞닥뜨려야 할 그 장벽과 한계를 알 수 없는 도전입니다. 로마 교회는 바오로 자신이 세우지 않았지만, 바오로는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곧 약속을 성취하고 영광으로 이끌며 사랑에 바탕을 둔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는 희망의 메시지를 모든 이에게 전하고자 서둘러 로마에 당도하려는 열망을 불태웁니다.
3. 실제로 희망은 사랑에서 비롯되고,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성심에서 샘솟는 사랑에 토대를 둡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10). 아드님의 생명은 우리 자신의 신앙 생활 안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세례로 시작되고 하느님 은총을 따름으로써 발전되어, 성령의 활동으로 언제나 새로워지고 흔들리지 않는 희망으로 활기를 얻습니다.
성령께서는 순례하는 교회의 삶 안에 항구히 현존하심으로써 희망의 빛으로 믿는 모든 이를 밝혀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결코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우리 삶을 지탱하고 활력을 주는 그 희망의 불이 타오르도록 지켜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속이지도 실망시키지도 않습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7-39). 여기에서 우리는, 이 희망이 시련 가운데에서도 꺾이지 않는 이유를 봅니다. 곧, 믿음에 토대를 두고 애덕으로 길러지는 희망은 우리가 삶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했듯이, “어떤 생활 신분이든 우리는 영혼의 이러한 세 본성 없이는, 곧 믿음과 희망과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1)
4. 바오로 성인은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삶에는 기쁨과 슬픔이 이어지고, 늘어나는 어려움으로 사랑이 시험대에 놓이며 환난 앞에서 희망이 무너지는 듯 보이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로마 5,3-4). 바오로 사도에게 시련과 환난은 몰이해와 박해 가운데에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입니다(2코린 6,3-10 참조). 그러나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어둠을 가르는 빛을 봅니다. 복음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흘러나오는 힘으로 증진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희망과 긴밀하게 연결된 덕인 인내를 실천하는 법을 배웁니다. 서두름이 일상이 되어 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원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더 이상 만남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 가정 안에서조차 함께하며 차분히 정담을 나누기가 어려워지곤 합니다. 서두름이 인내를 사라지게 만들어 심각한 피해를 입힙니다. 실제로 조급함, 신경질, 그리고 때로는 불필요한 폭력이 되어 불만과 불통을 조장합니다.
이 인터넷 시대에, 시간과 공간은 언제나 현재하는 ‘지금’에 매여 있기에, 인내가 설 자리가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시 경외심으로 피조물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인내의 중요성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계절의 바뀜과 수확에 감사할 수 있고 동물의 삶과 그 성장 주기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또한 800년 전에 쓴 ‘피조물의 찬가’(Cantico delle Creature)에서 피조물을 대가족으로 인식하고 태양을 “형제”, 달을 “누이”2)라고 불렀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단순한 눈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인내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우리가 부단히 견디며 하느님 약속을 굳게 신뢰하여야 한다는 맥락에서 인내를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성인은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로마 15,5)이신 하느님의 인내를 증언합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로 우리의 희망을 지켜 주고, 덕이요 삶의 길인 희망의 힘을 길러 줍니다. 인내의 은총을 자주 청하는 법을 배웁시다. 인내는 희망의 딸이며 동시에 희망의 굳건한 토대입니다.
희망의 여정
5. 희망과 인내의 이러한 상호 작용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생활은 희망을 북돋고 지탱하는 데에 더욱 집중하는 때가 필요한 여정이라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희망은 주 예수님과의 만남이라는 목표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이끌어 주는 한결같은 길동무입니다. 1300년 첫 번째 희년이 선포되기에 앞서 대중 영성으로 북돋워진 은총의 여정이 있었음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용서의 은총이 다양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거룩하고 충실한 백성에게 베풀어진 것을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성 첼레스티노 5세 교황께서 1294년 8월 28일과 29일에 아퀼라에 있는 산타 마리아 디 콜레마죠 대성전을 방문한 모든 이에게 수여하신 위대한 ‘대사’(大赦)를 떠올려 봅시다. 이는 보니파시오 8세 교황께서 성년을 제정하신 때보다 6년 앞선 일입니다. 교회는 이미 희년의 은총을 하느님 자비의 기회로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1216년에 호노리오 3세 교황께서는 8월 초하루와 초이틀에 포르치운콜라를 찾는 모든 이에게 대사를 베풀어 달라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청원을 들어 주셨습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의 경우도 그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1222년, 갈리스토 2세 교황께서는 야고보 성인의 축일이 주일에 올 때면 언제나 산티아고에서 희년을 거행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처럼 희년을 ‘곳곳에서’ 거행하는 전통을 이어 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용서하시는 힘이 순례길에 나선 공동체와 개개인에게 버팀목이 되고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희년 행사의 근본 요소는 순례입니다. 전통적으로, 순례 여정을 나서는 것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도보 순례는 침묵, 노력, 단순한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데에 큰 보탬이 됩니다. 다가오는 희년에 희망의 순례자들은 틀림없이, 희년을 충만하게 살아내고자 옛 순례길과 오늘날의 순례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로마 자체에서도 전통적인 카타콤바와 일곱 교회 방문과 더불어 또 다른 순례 여정이 제안될 것입니다. 국경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우리는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넘어가고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건너가서 피조물과 예술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서로 다른 체험과 문화의 풍성함을 보물로 여기는 법을 배웁니다. 또한 기도 안에서 그 아름다움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하느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에 감사하게 됩니다. 순례길과 로마 시내에 있는 희년 성당들은 믿음의 순례길에서 쉼터이자 영성의 오아시스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 우리는 그곳에서 모든 참된 회심의 여정의 본질적 출발점인 화해의 성사에 다가가, 희망의 샘에서 길어 올린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개별 교회에서는 사제와 신자들이 고해성사 거행을 준비하며 개별적 고백의 형태로 기쁘게 고해성사를 할 수 있도록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저는 이 순례에 함께하도록 동방 교회의 신자들을, 특히 베드로의 후계자와 이미 완전한 친교를 이루고 있는 이들을 초대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충실하다는 이유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고 때로는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어머니이며 그들에 대한 수많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이곳 로마에서 그들이 특별히 환영받는다고 느껴야 합니다. 동방 교회의 옛 전례, 동방 교부들과 수도승들과 신학자들의 신학과 영성으로 윤택해진 가톨릭 교회는 동방 가톨릭 교회의 신자들과 정교회 형제자매들에 대한 환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이 시대에 흔히 폭력과 불안정함 때문에 자신의 고향과 거룩한 땅을 떠나 안전한 곳을 찾아가도록 내몰려 그들 자신의 십자가의 길을 인내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버리지 않고 어디를 가든 그들과 함께하는 교회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을 아는 데에서 비롯된 희망이 그들에게 희년이 상징하는 바를 더욱더 강력히 체험하게 해 줄 것입니다.
6. 2025년 성년은 그보다 앞서 있었던 은총의 거행들과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거행된 정기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천 년을 갓 넘은 때였습니다. 그 뒤 2015년 3월 13일에 저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의 핵심 메시지인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3)을 알게 하고 만나 뵙도록 격려하고자 특별 희년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제 새로운 희년의 때가 왔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라는 확실한 희망을 마음속에 일깨우는 하느님의 사랑을 강렬히 체험하도록 모든 이를 초대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성문(聖門)이 열릴 것입니다. 또한 이 성년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거행, 곧 주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얻어 주신 속량을 기념하는 2000주년이 될 2033년을 향한 여정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우리는 커다란 기념 행사들로 이루어지는 순례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순례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은 그분의 백성을 앞장서며, 믿음 안에서 굳세고 애덕에 적극적이며 희망 안에서 인내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을 동반합니다(1테살 1,3 참조).
이 오랜 전통에 힘입어, 이번 희년이 온 교회에 은총과 희망의 생생한 체험이 되리라 확신하면서 이 회칙을 통하여 저는 2024년 12월 24일에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성문을 열어 정기 희년을 시작할 것을 결정합니다. 이어서 주일인 2024년 12월 29일에는, 올해 11월 9일에 성전 봉헌 1700주년을 맞는 성 요한 라테라노 로마 주교좌 대성전의 성문을 열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2025년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성모 교황 대성전의 성문이 열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025년 1월 5일 주일에 성 바오로 교황 대성전의 성문이 열릴 것입니다. 뒤에 말한 세 성문은 2025년 12월 28일 주일에 닫힐 것입니다.
또한 저는, 2024년 12월 29일 주일에 교구장 주교들이 모든 주교좌 성당과 공동 주교좌 성당에서 이 거행을 위하여 마련될 예식서에 따라 희년의 장엄 개막 미사를 거행하도록 결정합니다. 공동 주교좌 성당에서의 거행을 위해서는 적절하게 지명받은 대리자가 주교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집결(collectio) 장소로 선정된 성당에서 출발하여 주교좌 성당으로 행렬하는 순례는, 하느님 말씀의 빛으로 모든 믿는 이를 하나 되게 해 주는 희망의 여정을 상징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순례 여정 가운데 이 칙서의 일부 내용을 읽는 한편 앞서 말한 예식서의 규정에 따라 얻을 희년 대사를 공지할 수 있습니다. 개별 교회에서 성년은 2025년 12월 28일 주일에 끝날 것입니다. 성년 동안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 은총에 대한 희망의 선포에 그리고 그 결실을 증거하는 징표들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정기 희년은 2026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에 바티칸 성 베드로 교황 대성전의 성문을 닫는 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이 성년 동안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빛이 모든 이에게 전하는 하느님 사랑의 메시지로 모든 사람을 비추기를 빕니다! 또한 교회가 세계 각지에서 이 메시지를 충실히 증언하기를 빕니다!
희망의 징표들
7. 우리는 하느님 은총에서 희망을 찾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시대의 징표들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밝힌 대로,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 세대에 알맞은 방법으로 교회는 현세와 내세의 삶의 의미 그리고 그 상호 관계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4) 악과 폭력이 뒤덮었다고 생각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한한 선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현존이 필요한 인간 마음의 갈망을 포함하는 시대의 징표들이 희망의 징표들이 되어야 합니다.
8. 희망의 첫 징표는 오늘날 또다시 전쟁의 비극에 휩싸여 있는 이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염원이어야 합니다. 과거의 참상에 둔감해진 인류는 또 다른 시련에 직면해 있습니다. 많은 민족이 잔혹한 폭력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수많은 고난을 견뎌온 이들 민족의 미래는 어떠하겠습니까?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절박한 호소가 세계 지도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세계 지도자들은 전 세계 차원에 미칠 수 있는 결과를 고려하여 수많은 지역 분쟁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기 소리가 잠잠해지고 빗발치듯 벌어지던 파괴와 죽음이 멈출 수 있다는 꿈을 꾸는 것은 너무 허황된 것일까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마태 5,9)라 불릴 것이라는 말씀을, 희년에 우리가 되새겨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도전 과제를 제기하고 구체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합니다. 항구한 평화를 위한 협상의 자리를 용기 있고 창의적으로 마련하려는 외교적 노력이 부족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9. 희망을 품고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은 삶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이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상황에서 이러한 전망이 빠져 있습니다. 그 첫 번째 결과는 생명을 전달하려는 원의의 상실입니다. 많은 나라에서 우려스러운 출산율 감소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출산율 감소는 오늘날 정신없이 돌아가는 삶의 속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 고용 안정성과 적절한 사회 정책의 부재, 관계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윤 추구가 의제를 좌우하는 사회 모델에 따른 결과입니다. 특정 상황에서 “일부의 지나친 선택적 소비주의가 아니라 인구 증가를 비난하는 것은 문제를 회피하려는 술책일 뿐입니다.”5)
생명에 대한 개방성과 책임감 있는 부성과 모성은 창조주께서 남자와 여자의 마음과 몸에 새겨 놓으신 계획이며, 주님께서 부부와 그들의 사랑에 맡겨 주신 사명입니다. 이를 위하여 시급한 것은, 국가의 책임 있는 입법과 더불어 신자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 전체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의 확고한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랑의 결실인 아들과 딸을 낳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바람이 모든 사회의 미래를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희망에 관한 문제입니다. 곧 이러한 바람은 희망에서 생겨나고 희망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희망을 지지하고 북돋우는 사회적 약속의 필요성을 알리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약속은 포용적이고 어떠한 이념에도 매이는 일 없이, 오늘날 전 세계 많은 곳에 수없이 비어 있는 요람들을 다시 채울 수 있도록 아기와 어린이의 웃음소리가 가득 찬 미래를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삶의 기쁨을 되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창세 1,26 참조) 하루하루 잘 지내고 현재에 안주하며 물질적 실재들을 통해서만 성취감을 찾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편협한 개인주의와 희망의 상실로 이어지고 슬픔을 낳아 슬픔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불만과 불관용의 결과를 초래합니다.
10. 희년 동안 우리는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을 위한 희망의 구체적인 징표가 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저는 자유를 박탈당한 채 날마다 힘든 옥살이를 하고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으며 적지 않은 경우에 인격도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옥에 갇힌 이들을 떠올립니다. 희년에 정부가 희망을 되살리기 위한 활동들을 추진할 것을 제안합니다. 여기에는, 개인들이 자신감과 사회에 대한 신뢰를 되찾게 돕는 사면이나 용서의 형태들 그리고 법 존중에 대한 구체적인 약속을 포함하는 공동체 재통합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오랜 호소입니다. 그분의 지혜는 언제나 시의적절합니다. 이 호소는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자비와 해방의 행위를 요구합니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레위 25,10). 훗날 이사야 예언자는 모세 율법의 이 제도에 관하여 다시 언급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2).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이 말씀을 당신 말씀으로 삼으시며, 당신 자신 안에서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성취되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루카 4,18-19 참조). 전 세계 각지에서, 믿는 이들과 특히 그들의 목자들이 하나 되어, 감옥에 갇힌 이들을 위한 존엄한 처우와 인권 존중,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신앙에 반대되고 용서와 재활의 희망을 모두 없애 버리는 사형제도의 폐지를 요구하여야 합니다.6)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구체적인 친밀감의 징표를 보여 주기 위하여, 저는 교도소에서 성문을 열고자 합니다. 이는 그들이 희망과 새로운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도록 초대하는 징표입니다.
11. 가정이나 병원에 있는 병자들에게도 희망의 징표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병문안 오는 사람들의 친밀함과 애정으로 그들의 고통이 덜어질 수 있습니다. 자비의 행위는 무한한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희망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종종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병자들과 가장 힘없는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돌봄과 관심으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 모든 보건 종사자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를 경험하는 특별히 어려운 상황에 있는 모든 사람, 특히 개인의 자립과 자유에 심각한 제약이 되는 질병이나 장애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에게도 폭넓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보살핌은, 사회 전체의 일치된 참여를 촉구하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찬가이자 희망의 노래입니다.
12. 희망의 구현 그 자체인 이들, 곧 젊은이들에게도 희망의 징표가 필요합니다. 안타깝게도 젊은이들은 종종 그들의 꿈과 열망이 좌절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우리는 젊은이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됩니다. 미래가 젊은이들의 열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의 열정을 보게 될 때, 예를 들어 재난이 닥쳤을 때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때 팔을 걷어붙이고 자원봉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참 흐뭇합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고, 불확실하고 보장되지 않는 미래에 직면하며,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일자리나 고용 안정성, 또는 현실적인 전망이 없는 젊은이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꿈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이 없으면, 젊은이들은 낙담하고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약에 빠져들고 범죄의 위험을 무릅쓰며 찰나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더 큰 해를 끼칩니다. 젊은이들이 삶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접할 수 없게 하고 우울감을 느끼게 하며 심지어 자기 파괴적인 행동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희년은 교회가 젊은이들에게 다가가고자 더 큰 노력을 기울이도록 힘을 북돋우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새로워진 열정을 가지고 청소년, 학생, 젊은 커플, 성장하는 세대에 대한 돌봄과 관심을 보여 줍시다. 젊은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갑시다. 젊은이들은 교회와 세상의 기쁨이자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13. 희망의 징표는 자신들과 가족들의 더 나은 삶을 찾아 고향을 뒤로하고 떠난 이주민들을 위해서도 존재해야만 합니다. 이들의 기대가 편견과 거부 때문에 결코 좌절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이의 존엄성을 존중하면서 그들을 받아들이는 환대의 정신에는 그 누구도 품위 있게 살아갈 권리를 거부당하지 않도록 반드시 책임감도 수반되어야 합니다. 국제적 긴장의 고조로 전쟁과 폭력과 차별을 피하려고 이주할 수밖에 없는 망명자들과 실향민들과 난민들은 안전을 보장받아야 하고 새로운 사회 환경에서 자리를 잡는 데에 필요한 수단인 고용과 교육에 대한 접근성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언제나 가장 취약한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마음가짐을 갖추고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누구도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결코 도둑맞지 않도록 이들을 환영하기 위하여 공동체의 문을 활짝 열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최후의 심판에 대한 위대한 비유에서 하신 말씀이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울려 퍼지기 바랍니다. “너희는 ……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마태 25,35).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14. 종종 외롭고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노인들 또한 마땅히 희망의 징표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존재가 보물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삶의 경험들과 쌓아온 지혜와 여전히 기여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하여 그들을 존경하는 것은 세대 간 약속을 강화하는 일에 협력하도록 부름받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시민 사회의 의무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조부모들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조부모들은 젊은 세대에게 신앙과 지혜를 전해 주는 모범입니다. 그들 안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고 이해와 격려의 원천을 찾는 자녀의 감사와 손주의 사랑에서 그들이 활기를 얻기를 바랍니다.
15. 흔히 생필품조차 부족한 수십 억 명의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이 주어지기를 진심으로 청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새로운 형태의 빈곤에 쉽게 익숙해지고 체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세계의 특정 지역만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도 맞닥뜨리게 되는 비극적 상황에서 눈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하거나 빈곤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을 날마다 만납니다. 그들은 심지어 바로 이웃집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노숙자거나 그날그날 끼니를 잇기 어려운 경우도 흔합니다. 그들은 많은 이들의 배척과 무관심에 고통받습니다. 엄청난 자원을 가졌지만 대부분이 무기를 만드는 데에 사용되는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이 “수십 억 명에 이르러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이들은 오늘날 국제 정치와 경제 토론에서 언급되고는 있지만, 그들의 문제는 거의 의무감에 못 이겨 또는 미미하게 다루는 부록으로 제시되거나, 아니면 그저 부수적 피해로만 여겨질 수도 있다는 인상을 빈번히 줍니다. 사실, 모든 것이 정리되고 나서 보면 이들의 문제는 가장 뒷전으로 밀려나 있습니다.”7) 잊지 맙시다. 가난한 이들은 비난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희생자입니다.
희망에 대한 호소
16. 희년은 예로부터 전해 온 예언자들의 말씀을 상기시키며 지상의 재화가 소수 특권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것임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부유한 이들은 너그러워야 하며 궁핍한 형제자매들에게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저는 특히 물과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이들을 생각합니다. 굶주림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인류의 몸에 생긴 아물지 않는 상처입니다. 또한 우리 모두에게 진지한 양심 성찰을 요구합니다. 저는 다시 한번 호소합니다. “무기와 기타 군비 지출 비용으로, 결정적인 기아 퇴치와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발전을 위한 세계 기금을 조성합시다. 이로써 그러한 가난한 나라들에서 사는 주민들이 더 이상 폭력적이거나 기만적인 해결책에 의지하지 않고, 더 품위 있는 삶을 찾아 조국을 저버릴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합시다.”8)
저는 다가오는 희년의 빛 안에서, 상대적으로 풍족한 나라들에게 한 가지를 더 호소하고자 합니다. 과거에 그들이 했던 수많은 결정들의 무게를 인식하고 빚을 갚을 길이 없는 나라들의 부채 탕감을 결심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는 관용의 문제이기에 앞서 정의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가 오늘날 새로운 형태의 불의로 말미암아 더욱더 심각해지고 있음을 차츰 인식해 나갑니다. “현실적인 ‘생태적 빚’은 특히 남반구와 북반구 사이에 발생한 것으로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상업적 불균형, 그리고 특정 국가들이 장기간에 걸쳐 천연자원을 지나치게 이용한 사실과 관련됩니다.”9) 성경의 가르침대로, 땅은 주님의 것이고 우리가 “이방인이고 거류민”(레위 25,23)으로 머무르는 곳입니다. 우리가 진정 이 세상에서 평화의 길을 닦으려 한다면, 불공정하고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해 주고 굶주리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줌으로써 불의의 제반 요인들을 제거하는 데에 다 함께 헌신합시다.
17.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날인 제1차 니케아 보편 공의회 1700주년이 희년 동안에 기념될 것입니다. 사도 시대부터 주교들이 다양한 기회에 모여 교리 문제와 규율 문제를 논의해 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 세기에는 동서방에서 모두 시노드가 자주 열려 하느님 백성의 일치와 충실한 복음 선포를 보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희년은 이러한 시노달리타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복음화의 시급한 요구에 응답하는 데에 이러한 시노달리타스가 더욱더 필요하다고 여깁니다. 수많은 희망의 징표가 이 세상에서 하느님 현존을 증거할 수 있도록, 세례 받은 모든 이가 저마다의 은사와 직무를 통하여 공동의 책임을 맡습니다.
니케아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이 부인되고 성부와 한 실체이심이 부정되는 상황에서 심각한 위기에 놓인 교회의 일치를 지켜 나갈 방법을 모색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으로 소집된 300여 명의 주교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첫 번째 회의는 325년 5월 20일에 황제의 궁전에서 열렸습니다. 다양한 토론을 벌인 끝에 그들은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가 주일마다 성찬 거행에서 지금도 여전히 바치는 신경을 만장일치로 승인하였습니다. 공의회 교부들은 최초로, 온 교회가 친교를 이루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신앙을 고백한다는 징표로서 “저희는 믿나이다.”10)라는 표현을 이 신경의 첫 마디로 삼기로 하였습니다.
니케아 공의회는 교회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념일의 경축으로 삼위일체 특히 “성부와 한 실체이신”11)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에게 사랑의 신비를 계시하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습니다. 그런데 니케아 공의회는 가시적 일치를 향하여 꾸준히 나아가라고 모든 교회들과 교회적 공동체들에게 전하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기도에 온전히 응답하기 위한 적합한 길을 꾸준히 찾으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1).
또한 니케아 공의회는 부활 대축일의 날짜를 논의하였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접근법들이 우리 신앙의 본질적 사건을 서로 동일한 날에 기념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로, 2025년 희년에는 부활 대축일이 공동으로 거행될 것입니다. 이 칙서의 호소로, 동서방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 대축일의 공동 거행일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결단 어린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과거의 논쟁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와 관련한 분열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유념하여야 합니다.
희망에 닻을 내려
18. 희망은 믿음과 사랑과 함께 그리스도교 생활의 핵심을 표현하는 ‘대신덕’의 삼덕을 이룹니다(1코린 13,13; 1테살 1,3 참조). 희망은, 이 향주삼덕이 이루는 불가분의 일치 안에서, 믿는 이들의 삶에 내적 지침과 목표를 제시하는 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우리를 격려합니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우리는 분명 ‘희망이 넘치도록’(로마 15,13 참조)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 마음속에 자리한 믿음과 사랑을 믿음직스럽고 매력적으로 증언할 수 있고, 우리의 믿음에는 기쁨이, 우리의 사랑에는 열정이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각자가 미소, 우정의 작은 몸짓, 친절한 눈길, 기꺼이 귀 기울이는 경청, 선행을 베풀며 예수님의 영 안에서 이러한 행동들이 전해지는 이들에게 희망의 풍성한 씨앗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희망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 희망의 이유’(1베드 3,15 참조)에 대하여 잠시 멈추어 묵상해 봅시다.
19. “[저는]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12) 이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이 말씀에서 그 본질적 토대를 발견합니다. 희망은 “우리의 행복인 ……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게 하는 향주덕”13)이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희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 기초를 두지 않고 영생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오늘날 흔히 그러하듯 인간의 존엄성은 극심히 손상될 것이며, 생명과 죽음, 죄와 고통의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아 사람들은 흔히 절망에 빠지고 말 것이다.”14)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구원한 희망에 힘입어, 인류의 역사와 우리 개개인의 역사가 결코 막다른 길이나 어두운 심연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주님을 만나 뵐 때를 향하여 간다는 확신의 눈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분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희망을 품고 우리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으로, 거룩한 성경의 맺음말이기도 한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진심 어린 기도를 함께 바칩니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20.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자 우리 희망의 기초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네 개의 동사를 사용하여 이를 간단명료하게 말합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 그리스도께서는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되살아나시고,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의 비극을 경험하셨습니다. 성부의 사랑은 예수님을 성령의 힘으로 되살리셨고, 그분의 인성으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첫 열매를 맺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곧, 모든 것의 끝처럼 보이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리스도의 은총 덕분에 영원토록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라는15)” 확신을 가집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묻힌 우리는,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죽음의 벽을 허물어뜨리고 죽음을 영원으로 향하는 통로로 만드는 새 생명의 선물을 받습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이들과의 고통스러운 이별인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공허한 미사여구로는 그 슬픔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그러나 희년은 우리가 세례성사로 받은 새 생명의 선물, 곧 죽음의 극적 사건을 변모시킬 수 있는 생명의 선물에 다시 한번 한없이 감사하도록 하는 기회를 줍니다. 희년의 맥락 안에서 이 신비가 교회 생활의 초 세기부터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지에 대하여 성찰해 볼 만합니다. 예를 들어, 로마의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의 세례당이 그러하듯 아주 오래된 여러 세례당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세례대를 팔각형으로 짓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는 세례가 부활의 날인 ‘여덟째 날’의 새벽이자 일반적인 주간의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여 영원의 차원과 영원한 생명에 열리게 하는 날임을 상징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상 순례 여정에서 지향하는 목표는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로마 6,22 참조).
이러한 희망에 대하여 순교자들이 가장 설득력 있는 증언을 합니다. 순교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안에 굳건히 머물며, 주님을 배반하기보다 지상에서의 생명 자체를 포기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은 끝이 없는 생명을 고백하는 이들로서, 모든 시대에 수없이 존재하였고 오늘날에는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을 더욱 확고하게 하고 좋은 열매를 맺게 하려면 그들의 증언을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에 속한 순교자들은 일치의 씨앗이고 피의 교회 일치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러한 순교자들의 풍성한 증언을 강조하고자 교회 일치적 거행도 희년에 포함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21. 그런데 우리는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이 죽음의 문턱을 넘어 영원히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바라보고 그 사랑에 참여하면서 하느님과의 충만한 친교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지금 희망 안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을 실제로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저의 온 존재가 당신과 하나 될 때, 더 이상의 고통과 수고는 없을 것입니다. 저의 생명은 당신으로 온전히 채워진 참된 생명이 될 것입니다.”16) 이 충만한 친교의 특징이 무엇이겠습니까? 행복입니다. 행복은 우리 인간의 소명이고, 모든 이가 열망하는 목표입니다.
그런데 행복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다리고 열망하는 행복이 무엇입니까? 덧없는 쾌락, 한 번 경험하면 계속해서 더 갈망하게 만드는 순간의 만족감, 우리의 마음이 충족되지 않고 점점 더 공허하게 만드는 집착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복을 갈망합니다. 행복은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충만함을 가져다줄 수 있는 단 한 가지, 바로 사랑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지금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랑받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합니다. 그리고 나는 실망시키지 않는 사랑 안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 무엇도 그 사랑에서 나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바오로 사도의 말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22. 영원한 생명과 관련된 또 다른 현실은, 우리 개개인의 삶의 끝에 그리고 역사의 끝에 있을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예술가들은 종종 이 최후의 심판을 묘사하고자 시도하였는데 -여기에서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역작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들 시대의 신학적 ?
- 이전글2025년 정기 희년 대사 수령 교령 24.12.1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